1편 - 여행 준비와 일본 도착 [링크]
2편 - 아이노지마로 가는 길 [링크]
3편 - 바다 고양이들이 뛰도는 냥냥섬 아이노지마 [링크]
4편 - 쿠마모토의 돈까스 전문점, 돈카츠 카츠레츠테이 [링크]
5편 - 쿠마몬 사냥은 대실패로 끝나고... [링크]
6편 - 쿠마모토성과 노면전차 [링크]
7편 - 돈코츠 라멘의 원조 쿠마모토 코쿠테이 [링크]
8편 - 나가사키의 야경과 나가사키 짬뽕 [링크]
9편 - 군함도(하시마, 군함섬, 군칸지마 軍艦島) 상편 [링크]
시맨상회(シーマン商会)의 배 사루쿠호(さるく号; 큐슈 사투리로 사루쿠는 '걷다' 라는 뜻입니다)를 이용해 나가사키항(長崎港)을 출발, 드디어 군함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군함도의 부실한 접안 시설 탓에 상륙 할 수 없습니다.
날씨가 잔잔한 날이 연중 많지 않기 때문에, 운이 좀 따라줘야 군함도에 상륙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천만다행으로 잔잔한 날이 걸려서 섬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운이 정말 좋았던 것이, 8월 말에 날씨가 굉장히 안 좋았고, 9월 중순에는 일본 전역에 큰 태풍이 불었습니다.
딱 그 사이 날씨가 반짝 좋았던 9월 초에 방문했던 것이죠.
하카타에서 히야시 치킨도 못 먹고 쿠마모토에서 쿠마몬도 못 보고... 군함도 까지 못 갔으면 정말 억울했을 겁니다...
군함도에 가는 법은 9편 [링크]를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하시마는 석탄을 캐느라 저 좁은 섬에 사람들이 다닥 다닥 붙어서 살았습니다.
군함섬에 갱도 입구를 내어놓고, 무려 바다 밑으로 터널을 파서 석탄을 채굴 했습니다.
해저 갱도가 수직으로 최장 1Km(1,010M)에 이르렀다고 하니, 뭐랄까,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석탄 채굴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절정에 이릅니다.
일본은 자체적인 유전이나 정유시절이 없었고,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석탄에 의존했습니다.
종전 직전에는 연간 최고 40만톤 가량의 석탄을 채굴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테지만, 이 시기에 식민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 당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제일 힘든 일, 즉 갱도의 끝에서 갱도를 개척하는 "막장"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몸뚱이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좁은 건 둘째치고, 한 겨울에도 40도에 육박할만큼 더워서 훈도시 한 장만 입고 드러누워서 석탄을 캐야 했다고 합니다.
조선인에게 제공 됐던 숙소는 제일 나쁜 자리여서 파도 치면 파도가 창을 넘어 들어올 정도였다고 하고, 식사라고는 된장국에 쌀밥만 주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제징용 당한 분들에 대한 배상은, 박정희 정권이 일방적으로 체결 해버린 "한일기본조약"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박정희 정권이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맺은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일본의 모든 법적 책임은 끝나버렸기 때문에, 일본이 더이상 과거사에 대해 책임 질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
특히 개인에 대한 보상도 이 조약으로 인해 한국정부로 그 책임이 넘어왔는데, 개인에게 돌아갈 배상금까지 박정희가 경제발전 시킨답시고 엉뚱한 곳에 써버립니다.
포항제철소(현재의 포스코)가 이 조약으로 얻어온 저리의 차관과 배상금(일본 쪽에서는 지원금이라고 부릅니다만)으로 지은 것이죠.
미츠비시 역시 한일협정을 들먹이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사죄나 배상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군함도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한 적이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유투브 영상 [링크]을 클릭 해 보시길.
한 30분 정도 갔을까....
군함도에 가까워지자, 시계 방향으로 한 번, 반대 방향으로 또 한 번 정도 섬을 주유 한 다음, 드디어 접안을 시도합니다.
사루쿠호의 노련해 보이는 승무원이 안전장비도 없이 폴짝 뛰어서(...) 배를 접안 시키는군요.
밑의 사진처럼 구명조끼도 안 입은 분이 폴작 폴짝 하니 보는 제가 다 철렁하더군요.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드는 모임" 회장님...이라는 환갑을 넘은 할아버지가 가이드를 해줍니다.
군함도에서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가 섬 주민 전체가 퇴거하면서 졸지에 쫓겨났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력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군함도가 화제가 되면서,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이신 모양입니다.
물론 방문 당시에는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태였습니다.
이건 보나마나 열도의 흔한 우익이겠지 싶었는데, 웬걸 가이드 내용이 일본 정부에 꽤 비판적입니다.
섬을 떠나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는 둥, 갱도에서 나오면서 살아있는 걸 실감하며 목욕을 했다는 둥,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는 둥, 여러분도 살면서 그런 계단에 올라본 적이 한 두번은 있지 않겠느냐는 둥의 감정에의 호소가 꽤 있기는 했습니다만...
"일본의 에너지 정책이 바뀌면서 섬의 주민들이 한꺼번에 퇴거 당했다"
"후쿠시마 주민들도 인해 원치 않는 사건으로 한꺼번에 고향을 잃었는데, 군함도 주민들과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거, 일본에서 후쿠시마가 거의 금기어인 걸 생각하면 꽤 강한 발언입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처럼 안 좋은 사례로 이야기 할 경우에는 특히나 더, "동북대지진"이라고 하지 절대로 후쿠시마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의 에너지 정책으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놀러온 사람들인 관광객들에게 대놓고 이야기하다니...
그냥 가이드만 하는 사람은 아니더군요.
섬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보수를 한 부분이 있는데, 석탄 필요없다고 버릴 때는 언제고 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서 고치는 건 또 뭐냐는 식으로로 정부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일단 이 할아버지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강제징용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하시마에 자원해서 갔던 조선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매우 극소수(한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수백명의 강제징용 피해자들 중 자발적으로 간 사람이 몇명 끼어있었다고, 강제징용이 정당화 되지는 않습니다.
이건 수십만명의 시위대 중에서 몇 명이 폭력을 휘둘렀다고 시위 전체를 폭력시위라고 하는 박근혜 정부나 일베충 들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더군다나 일본인도 강제징용 당했다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주장이죠.
일본인들도 강제징용 당했다는 게 식민지 조선인들의 강제징용을 정당화 하지는 않죠.
실로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또한 식민지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대우가 매우 달랐다는 증언이 많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극히 일부 부분에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고, 모든 한국인이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겠지요.
당장 미쯔비시는 한국인 강제징용자에게 어떤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급료를 모두 지급했으니 집집마다 TV도 보고 그랬겠죠...
일본 정부에 분명 비판적인 가이드 내용이었지만, 강제징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건 역시나 씁쓸한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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