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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sip/Game

HALO: Reach 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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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PS 게임 업계에는 몇 차례의 변곡점이 있었습니다.
DOOM(1993)이 대성공하면서 FPS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았고, 하프라이프(1998)는 FPS 게임 플레이와 스토리 네러티브를 조화 시키는 데에 성공 했습니다.
HALO(2001)는 FPS라는 장르가 PC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2007년에 등장한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CoD 4)는 롤러코스터 스타일의 선형 진행 FPS들이 쏟아져나오는 계기가 됐습니다.
요즘은 포트나이트, PUBG 이후로 배틀 로얄 류의 게임들이 흥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이번에 얘기할 게임은 나온지 10년도 더 넘은 게임인 "HALO: Reach"입니다.
2019년 HALO: Anniversary Edition에 추가되어 PC에서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HALO: Reach(2010, 이하 리치)는 HALO의 대성공 이후 번지가 Microsoft와 결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제작한 게임입니다.
Call of Duty(이하 콜옵)이 워낙에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2010년대 나오는 FPS들은 대부분이 싱글 캠페인에 자유도 없는 선형 구성을 보이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리치 역시 콜옵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았습니다.
플레이어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으며, 주어지는 목표를 연이어 완수해야 합니다.


게임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주인공 캐릭터 "노블 6"의 헬멧. 번지의 마지막 작품. 엔딩 내용도 그렇고, 수미쌍관식 연출입니다.


리치는 2010년 게임인 것을 감안해도 FPS게임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이미 당시에도 대세였던 마우스 우클릭 조준(ADS; Aming Down Sight)도 없고(DMR 같은 일부 무기에만 한정), 마커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진행이 막혀서 이곳저곳을 헤메야 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렇다고 마커를 기술적으로 넣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은 것이, 캠페인 중간의 TPS 슈팅 부분에서는 적기의 수가 줄어들면 마커가 그제서야 나타납니다.
마커가 너무 많이 뜨면 우왕 좌왕 하게 될테니 저렇게 처리를 한 것 같기는 한데, 자연히 왜 지상에서는 마커가 없나...라는 의문이 듭니다.
툴팁이나 튜토리얼도 없어서 어떤 버튼을 눌러야 뭐가 나가는지 설명도 안 해줍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동료는 "나이트 비전을 켜라"고 하는데 그게 어떤 키인지 알아야 켤 것 아닙니까.


번지 헤일로 특유의 걷는 느낌이 안 나고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느낌은 리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캐릭터가 "걷는"다는 느낌이 전혀 안 나고 뛸 때나 헉헉대는 소리가 좀 나서 아 내 캐릭터가 뛰기는 뛰는구나 싶어집니다.
헤일로 시리즈가 유행시킨, 시리즈 특유의 아이덴티티이긴 한데... 무기마다 탄약이 부족하고 그나마도 무기 두 개 밖에 들 수 없어서 무기를 자주 바꿔들어야 한다는 점도 좀 짜증 납니다.


번지 제작 헤일로가 팬덤들 사이에서 이상하게 고평가 받는 경향이 심한데...
당시에도, 지금 기준으로도, 헤일로 시리즈는 엉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헤일로가 가지는 의의는 콘솔에 맞게 FPS를 만들면 팔리는구나, 를 사람들에게 각인 시킨 것이지 게임 자체가 어마무시한 마스터피스였던 건 아닙니다.
특히 헤일로가 나왔을 당시, 즉 2001년에는 Xbox에 할 게임이 아무것도 없어서 헤일로는 울며 겨자먹기 같은 느낌도 있었고요.
리치 역시 FPS 게임으로는 어딘가 엉성한 부분이 많고, 동시기 경쟁작들에 비해 캠페인 설계등이 훌륭하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리치의 주인공은 양산형 스파르탄(Spartan-III)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마스터 치프(Spartan-II)와 동급 사양. 사진은 "에밀 A-239".


헤일로 시리즈의 주인공인 마스터 치프는 먼치킨이라서 가는 곳마다 승리합니다.
난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치프가 나타났다 하면 모든 NPC가 "저것봐! 마스터 치프야! 우린 살았다!"(그리고 그 NPC는 잠시 후 으악 쥬금...)를 외칩니다.
딱 60년대 싸구려 스페이스 오페라 주인공입니다.
지구인-코버넌트-플러드 삼파전이라는 설정 역시 워해머등에서 볼 수 있는 60년대 SF의 유행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FPS 게임 주인공들 대부분 말이 없거나 말수가 적다는 전통을 치프 역시 충실히 지키고 있고, 코르타나를 못 잃어서 징징대는 모습은 냉철한 군인이라기보다는 그냥 엄마 잃은 아이같은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치프와 코르나타의 그 관계 자체도 좀 징그럽죠.
특히 코르타나는 AI라면서 벌거벗은 여성 모습을 할 필요가...?


리치를 명작이라고 부른다면, 바로 이 부분 때문입니다.
먼치킨 원맨 아미가 싸돌아다니는 싸구려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 거대한 전쟁에 휘말린 일개 병사(보통 인간보다는 훨씬 강하지만)들의 장렬한 투쟁기가 펼쳐집니다.
주인공 "노블 6"가 속한 노블 팀은 그야말로 쉴 틈 없이 작전을 수행하며 다수의 전술적 승리를 거두지만, 리치 행성이 함락되는 전략적 실패를 돌이키지는 못합니다.
외계인 침략군 "코버넌트"의 압도적인 물량에 아군이 연전연패 하며 노블 팀원들도 하나 둘 소모되어 갑니다.


전우의 시신을 거둬 퇴각하는 노블 팀.

 

노블 팀의 도움으로 리치 행성에서 탈출하는 "UNSC Pillar of Autumn".

 

전략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블 팀의 분투로 필라 오브 어텀은 무사히 리치를 탈출 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의 위치를 적에게 알리면 안 된다는 "Cole Protocol"에 따라 랜덤(?) 점프 한 곳이 바로... 헤일로 첫 작품의 배경인 04번 헤일로. 이렇게 리치의 마지막은 시리즈의 첫 작품 "HALO: Combat Evolved"로 이어집니다.


마스터 치프가 얼레벌레 쏘다니면서 온갖 적을 다 깨부수고 인류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시리즈의 전형적 패턴에서 벗어나, 이미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비장미 넘치는 스토리, 이것이 리치만이 가지는 최고의 미덕입니다.
헤일로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 특유의 유치함이 잔뜩 묻어 있는데, 리치는 그런 유치함을 쪽 빼고 패배와 죽음을 비장한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리치 행성의 패망은 게임 내에서도, 헤일로 미디어 믹스인 소설 등으로도 그 결말이 이미 알려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플레이어가 결말을 알고 있는 프리퀄이지만 본가 시리즈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와 매력을 마음껏 뽐낸 수작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헤일로 시리즈에서 이런 심각한 이야기(일반 대중은 머리에 힘줘야 하는 암울한 이야기를 기피하는 편이죠)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리치가 보여줬던 비장미 넘치는 스토리 라인은 리치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
헤일로 워즈 등의 외전작이 있지만 장르가 다르고, 5에서 잠깐 삐딱선을 타려는 시도를 했지만, "HALO: INFINITE"에 이르러선 (심각한척 온갖 폼을 다 잡지만 전혀 심각하지 않은) 마스터 치프 이야기로 회귀해 버렸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스핀오프, "Rogue One: A Star Wars Story"(2016, 이하 로그 원)과 굉장히 흡사한 구성을 가진 게임입니다.
로그 원 역시 원작의 전 시간대(프리퀄)를 다루기 때문에 이미 결말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과정에서 본작과는 결이 다른 비장미로 인기를 끌었죠.
리치 행성을 탈출하여 04 헤일로에 도달하는 필라 오브 어텀, "Star Wars: New Hope"로 이어지는 로그 원의 엔딩은 서로 구성이 빼다박았습니다. 
그리고 비장한 스타일의 프리퀄은 로그 원 하나로 끝나버렸다는 것마저 똑같습니다.
리치가 훨씬 먼저 나왔기 때문에 영감을 받았다면, 아마도 로그 원 쪽에서 베껴갔겠죠.


10년도 더 넘은 게임이라 지금 하기에는 그래픽도 좀 후져보이고, 위에서 설명한대로 게임으로도 몇 가지 나사 빠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버그도 좀 있고...
하지만 헤일로 프렌차이즈에서 가장 유니크한 명작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한 번쯤은 플레이 해보는 걸 권합니다.
헤일로 프렌차이즈에 마스터 치프의 이야기보다는, 이런 리치 스타일의 신작이 좀 더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헤일로 본편에서도 리치 행성의 운명은 종종 언급이 됩니다. 리치 행성을 박살 낸 사령관이 2편의 주인공 아비터라는 것도 언급되죠.

 

리치의 엔딩 연출은 일반적인 FPS 게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아주 인상적인 구성입니다. 이런 시리즈가 더 나와주었으면 하지만 시장 분위기도 많이 변했고... 아마도 어렵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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