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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sip/Other

코닥이 디지털에 대응 못해서 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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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는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시전설이라고도 하는 황당무계한 것도 있고 아주 그럴싸한 내용이지만 알고보면 뻥인 것들까지...


photographed by Kevin Carter, freelance photographer, a Pulizter winner in 1994. published in The New York Times.


사진은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프리랜서 사진가 케빈카터의 작품입니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가 "작가는 이 사진을 찍고 뭇사람들의 비난에 괴로워 하다가 자살했다"인데요...
사실과 다릅니다.
케빈 카터는 "뱅뱅클럽"이라는, 분쟁지역 촬영을 주로 하는 포토 저널리스트 그룹의 일원으로 험한 현장을 많이 다녔습니다.
뱅뱅클럽이라는 저 사진가 모임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나와 국내에도 개봉했었습니다[링크].
사람이 죽고 터지는 험한 현장을 전전하다가 얻은 PTSD, 프리랜서로 뛰면서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경제적 궁핍, 거기에 겹친 이혼...
그러다가 취재현장에서 절친한 친구가 눈앞에서 터져 죽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얼마안가 캐빈 카터는 자살하고 말았고, 유서에는 "빌어먹을 돈이 없다"는 내용은 있으나 저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없죠.
보다 자세한 것은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이라는 글[링크]을 보시면 잘 나와 있습니다.
캐빈 카터의 자살은 저 사진과 큰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와 비슷하게 잘못 알려진 것이...
후지필름과 코닥필름이 자주 비교대상이 되면서, 코닥은 디지털에 대응하지 못해 망했다, 라고들 하죠.
틀렸습니다.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누가 만들었을까요.
코닥이 만들었습니다(1975년).
코닥이 디지털에 대응을 못했다라?
코닥은 최근까지도 많은 디지털 카메라 제조업체에 센서(CCD)를 제공하기도 했으며(현재는 트루센스라는 독립회사가 되었습니다), 관련한 특허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현재는 특허 회사에 팔아치웠습니다. 뒤에 적겠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의 디지털 카메라는 코닥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뭐 물론 나오기야 했겠지만 꽤 늦어졌을겁니다.

튼 코닥은 이미 1980년대 부터 디지털 연구에 거액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미 1975년에 이미지를 디지털로 기록하는 장치를 개발했고, 같은 해 베이어 패턴이라는 지금 현재의 거의 모든 디지털 카메라에 쓰이고 있는 CCD, CMOS 배열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캐논과 니콘의 카메라 바디에 자신들의 센서를 결합한 테스트 제품도 내놓는등 디지털 카메라의 역사에서 코닥은 단연 앞서나갔습니다.
일단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하고..."와는 많이 다르죠?
디지털 원천기술을 다량으로 확보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상품화 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습니다.


뭔가 아그파 필름이 사진에 더 많아 보이지만 넘어갑시다. 코닥 수프라 800은 정말 좋은 필름이었습니다....


이야기 해야 하는 부분이 코닥의 연구 개발입니다.
미국에서 80년대 꿈의 직장, 그러니까 대략 지금의 구글 같은..... 어디였을까요? 코닥 연구소였습니다.
공돌이라면 누구나 코닥의 연구소에 가고 싶어했죠.
코닥의 창업주인 이스트먼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필름 사업의 성공으로 얻은 부를 사회에 환원했고, 사원들의 복지를 향상시켰으며, 연구소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이 연구소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비슷한 곳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가 있었는데 최근 박살낸다는 발표가 났죠).
정말 별 필요없는 것 같은 연구라도 신청하면 돈이 나왔었다고 하는데, 물론 수재들만 모였으니 특허가 차곡 차곡 쌓이게 됩니다.
코닥의 특허는 그 잘나신 애플도 눈독을 들일 정도였고, 결국 지난 2012년 코닥은 5억2천만 달러에 애플이 참여하고 있는 특허회사에게 특허 포트폴리오를 매각합니다(ㅠ_ㅜ).
그럼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나오겠죠.
아니 그렇게 대단하신 코닥이 왜 망하셨죠?


전설의 엑타크롬. 이제 이거 현상액을 안 만든다고 합니다. 필름이 있어도 현상을 못 한다니! 후지 약품으로 할 수는 있지만 색상이 좀 다르게 나옵니다.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코닥이 휘청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98협의"입니다.
중국시장에서는 후지필름이 저가공세로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미국 시장에서도 후지가 공격적으로 나와서, 코닥은 이걸 미국무역위원회에 제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코닥이 여기에 대응한답시고 CEO가 직접 중국으로 날아가서는....

"우리한테 필름 독점권을 주면 너네 국영 현상소 우리가 다 사줄게"

그러니까 후지 필름 몰아내고 코닥 필름을 독점으로 팔 수 있게 해주면 중국 정부가 처리에 고심하고 있던 중국 전역의 국영 현상소(중국은 경제개방 이전까지 폐쇄적 공산주의 국가였으므로 필름 현상소도 국영이었습니다)를 코닥이 떠안겠다는 그런 제안이었습니다.
그래서 98년 협의가 되어서 98협의죠.
뭐 점유율은 올랐습니다만. 시기가 1998년....
필름 시대의 끝물에 저런 무모한 딜을 하다니 코닥의 경영진이 이렇게 멍청했습니다.
이 98협의가 코닥 파산의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론 중국이라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코닥이 당장 망하진 않았습니다.
디지털 제품들도 잘 판매하고 있었고, 특히 디카의 심장인 센서에는 코닥의 특허가 걸려있어서, 캐논이든 니콘이든 디카 한 대 팔면 거기서 코닥이 로열티를 꼬박꼬박 걷어갔었습니다.
부자 망해도 3년 간다고, 중국만 가지고 망했겠어요?
코닥의 경영진이 이후 다른 삽질을 하게 되는데...

일단 잘못된 전략을 수립합니다.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이지쉐어라는 상표였죠)를 내놓으면서 이것을 가지고 자기네들이 보유한 전국의 현상소(Develop & Print, 흔히 DP점이라고 하죠)와 연결시키려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Easy Share 이지쉐어는 2001년 발표되었는데, 사진기만을 의미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디카를 포함한 프린터, 프린터 독, 온라인 사진 인화까지 포함한 개념이어습니다.
디카로 찍고, 코닥 프린터와 현상소에서 뽑고.
와 이론상으로는 완벽하네요. 국내에서도 이런 캠페인 한 적 있었습니다. 기억들 하시려나....
일단 코닥의 명성은 "사진을 찍고 그 필름(사진기)를 가지고 오면 현상소에서 알아서 다 해주는" 원스톱 서비스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코닥의 경영진은 당연히 이게 먹힐거라 생각했겠죠.

자 손들어 봅시다.
디카나 폰카로 찍은 사진 인화하는 분?
없죠?
예, 사진이 취미라는 저도 아주 가끔해요.....
사람들은 디지털 사진을 출력하기 보다는 모니터로 보는 편을 더 선호했고,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걸 더 즐겼습니다.
코닥무룩...
결국 코닥은 전국의 DP 체인을 정리하고 그 인력을 해고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지쉐어 브랜드는 지금도 남아있지만 프린트 관련 사업부는 모두 철수하고 온라인 인화 서비스만 '코닥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죠.


후지필름은 대단합니다. 좋은 필름을 많이 만들고, 아직도 회사이름을 "필름"이라고 하고 있는 것도 대단하죠.


지필름이 코닥과는 다르게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은 것은 사실입니다.
흔히들 사업 다각화가 성공의 비결이라는 둥의 이야기를 하죠.

언듯 그럴듯 해보이지만, "필름에 의지하다가"라는 표현은 틀렸고, 디지털 센서는 코닥이 원조이자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특허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코닥에 로얄티 내야했습니다.
디카는 코닥도 만들었고요.

또한 사업 다각화는 코닥도 했습니다!
사업다각화를 하기는 했는데, 화학회사를 인수한다거나.... 프린터 시장에 진출한다거나.....
사실 저 코닥 프린터도 나름 이유가 있던건데, 디지털로 패러다임이 이동하면서 사람들은 사진을 모니터로 보는 버릇이 들어서 DP점까지 가는 걸 귀찮아했죠.
그래서 가정용 프린터 시장이 꽤 커지게 됩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프린터 열풍이 불었죠.
코닥도 이것에 착안해서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아주 저렴한 잉크와 제품으로 승부를 걸었지만 그게 2005년.....
2005년에서 2년이 지난 2007년, 사진을 손으로 들고 다니면서 볼 수 있는(심지어 사진도 꽤 괜찮게 찍을 수 있는!) 아이폰이 나옵니다.

참고로 후지는 가정용 프린터는 안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있던 FDI용 업소용 대형 인화기 사업도 접어버렸죠.

지의 경우에는 운이 좋아서 문어발 확장을 했던 업종들이 중박 이상은 쳤습니다.
화장품이라든가 제약이라든가....
여담인데, 콜라겐은 필름제조에도 사용됩니다. 이를 응용한 후지의 콜라겐 화장품 브랜드가 콜라겐 유행을 타면서 인기를 끌었죠.
물론 콜라겐은 먹든 바르든 피부에는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 것 같은데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효과 없어요 그거.... 사지 마세요.....

아무튼 더 중요한 것은 후지필름은 본사 인원을 만명 가까이 정도 감축하면서 대대적인 해고를 했습니다.
물론 코닥도 해고를 했지만, 연구 인력 등은 함부로 자르지 않았습니다(위에 썼지만 코닥은 공돌이의 회사! 사원 복지!).
대부분 DP점 단순인력들이었죠.
또 어지간하면 자신들을 그동안 먹여살려준 필름사업도 디지털과 함께 같이 가져가려고 했죠.
후지는?
그딴거 없었죠.

회사이름이 후지"필름"인 주제에 필름 공장도 부수고 =ㅅ= 위에도 적었지만 FDI에 들어가는 현상기나 인화기 같은, 필름회사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핵심사업까지도 좋은 말로 "과감히" 도려냈습니다.
코닥은 어쨌든 기존의 사업부들을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후지는 날카롭게 다 잘라냈습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일화가, 코닥의 영화용 필름 현상 공장이 "최근에" 매물로 나왔죠....
나쁜 말로 하면 멍청한거고, 좋은 말로 하면 직원 함부로 안 자른다는 얘기입니다.
조금이라도 돈이 안 되는 부서는 모두 정리하고 해고 하면서 칼을 휘두른 후지는 덕택에 지금 잘 먹고 잘 삽니다.


사실 코닥이 망할만한 짓을 많이 하긴 헀지만, 디지털을 외면해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디지털에 잘 대응(?)하려다가 망했죠.


닥의 몰락은 단순히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했다, 라고 하면 틀립니다.
실제 사실과도 다를뿐더러, 특히 후지와의 비교는 좀 온당치 못한 면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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