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콘은 자기네 최고급 필름 카메라에 "F+한자리 숫자"라는 이름을 붙여왔습니다.
F6을 마지막으로 F 시리즈는 이제 나오지 않습니다.
최후의 필름 플래그십 F6은 안타깝게도... 아마추어용입니다.
이미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로 자리잡은 2004년에 발매된 F6은, 당연히도 프로용 기계는 될 수 없었습니다.
F6은 뭐랄까, 일종의 팬서비스 같은 카메라랄까요.
이미 필름 시장이 죽어버린 시기에, 하이 아마추어용이라고는 하지만 비싼 고사양의 필름 카메라를 내놓은 니콘도 참 재미있는 회사죠...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니콘 최후의 프로용 필름 플래그십 카메라는 바로 이 F5입니다.
F5는 1996년 발매되었습니다.
F 시리즈 자체가 니콘이라는 회사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지만, F5는 의미가 더 각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프레스(press 언론용) 카메라 시장에서 캐논의 [EOS 1]이 니콘을 압도하는 상황이었고, F5는 이런 상황을 뒤집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라이벌인 캐논과 니콘.
두 회사는 렌즈 끼우는 방향도 반대일 정도로 서로를 의식하며 요즘도 주거니 받거니를 벌이고 있습니다.
자동 초점(AF; Auto Focus) 시대가 되면서, 니콘은 자사의 F 마운트를 그대로 유지하며 자동 초점을 구현하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캐논은 EOS라는 새로운 규격을 채택하면서 기존 MF(Manual Focus; 수동 초점) 렌즈들을 모두 버리는 결정을 내립니다.
대신 L(Luxury) 렌즈라는 고급 렌즈, USM(Ultra Sonic Motor; 초음파 모터) 같은 여러가지 신기술을 적극 도입하며 판촉에 나서, 니콘을 슬금 슬금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캐논 AF 필름 카메라의 절정인 [EOS 1]은 니콘에게 치명타가 됩니다.
취재 현장이 캐논의 하얀 렌즈들로 뒤덮이게 된거죠.
그래서 F5는 EOS 1이 보여준 장점을 벤치마킹 하면서도, 당시 니콘의 모든 것을 동원해 만들었습니다.
절치부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F5는 프레스 지향의 매우 매우 매우 매우 튼튼한 카메라입니다.
튼튼함과 강력한 성능을 얻은 대신... 무거워졌죠.
AA 배터리 8개가 들어가므로 배터리 무게만해도 꽤 나가는데다가, 어지간한 줌렌즈라도 붙이면 3Kg는 우습게 넘어갑니다.
이 무게는 F5 최대의 단점이죠.
재미있는 특징으로 배터리 용량에 따라 AF 속도가 달라집니다.
보통 상, 하한선을 정해 일정한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맞습니다만, F5는 새 전지를 넣으면 AF가 엄청나게 빨라집니다.
당시 캐논은 USM(링 타입의 초음파 모터)를 도입하여 정숙함과 속도에서 크게 나아진 렌즈들을 내놓았습니다만, 니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카메라 본체에 달려있는 모터에 의존해서 AF를 구동했죠.
AF-S 렌즈를 부랴부랴 한-참 나중에 내놓기는 했지만 이미 캐논은 저만큼 도망간 뒤였습니다...
USM에 비해 느리다는 세간의 평가를 의식한 탓인지, F5에 들어간 모터는 대단히 강력합니다.
새 건전지를 넣으면 굉음을 내며 미친 듯 돌아가는 AF 모터에 놀라게 되죠.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배터리 소모가 좀 심한 편인데 후기형은 개선되었다고 합니다.
이 점 덕에 AF 스피드는 당대 최고였죠.
F 시리즈답게 철컥 철컥하는 묵직한 셔터음이 매력적입니다.
"F"들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셔터음도 튜닝합니다.
중저가 라인 카메라 셔터음은 대충 아무 소리나 나지만, 니콘의 자존심 F들은 정교하게 소리까지 계산해서 만들어진 덕에 셔터음마저도 격이 다릅니다.
1초당 8컷을 찍을 수 있는 연사 속도도 특징입니다.
단 5초 만에 36방 필름 한 통을 소모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속도입니다.
사용하면서 공셔터가 아닌, 실제 연사는 딱 한 번 써본 일이 있네요.
위의 故 노회찬 의원 사진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철컥철컥철컥철컥철컥...."
그리고........ 곧 필름이 아까워서 울게 됩니다...... ㅜㅠ
셔터 스피드 모니터 및 교정 회로가 있어서 셔터스피드가 설계 공차를 벗어나면 카메라의 작동이 멈춥니다.
이 현상이 발생하면 무조건 AS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에 튼튼하게 잘 만든 카메라이다보니, 저 현상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경험했다는 사람도 아직 못 봤구요.
필름을 다 쓰면 전지를 소모해서 오토 리와인드 할 수 있습니다만, 수동 리와인드 클랭크를 제공하고 있어서 손으로 빙빙 돌려 감을 수도 있습니다.
수동 카메라 느낌을 낼 수 있죠.
이것도 F 시리즈들 나름의 전통입니다.
보통 건전지 들어가는 카메라들은 오토 리와인드만 지원하니까요.
겉멋(?)도 멋이지만 전지를 그만큼 아낄 수 있어서 수동으로 리와인딩 하곤 했었습니다.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VR(Vibration Reduction; 손떨림 저감 기능)을 최초로 지원했습니다.
조리개링 달린 VR 렌즈들을 구형 필름 카메라에 붙일 경우 사진은 찍히지만, VR 기능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F5는 VR 기능을 문제없이 지원합니다.
물론... 그만큼 배터리가 더 빨리 소모된다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F5의 그립은 제가 만져본 모든 카메라를 통틀어, 단연 최고입니다.
무겁고 둔탁한 카메라지만, 부드럽게 내려오는 곡선을 가진 그립부는 이 무거운 카메라가 손에 "휘감기는 듯한" 착각까지 줄 정도입니다.
절묘한 무게중심과 부드러운 셔터 버튼도 이런 느낌에 한 몫 합니다.
그 어떤 카메라에서도 F5 이상의 그립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손에 착 감기는 느낌입니다.
사실 무겁고 건전지도 많이 먹어서 아무한테나 쉽게 추천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카메라 본체 무게만 1,210g인데 건전지를 8개나 냠냠하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별로 인기도 없죠...
1996년 나왔을 당시 정가는 325,000엔(세금포함) 그러니까 지금 환율로 치면 360만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이었습니다.
지금도 360만원이면 대단히 비싼데, 20년 전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입이 떡 벌어지죠.
요즘은 50만원 정도면 구할 수 있습니다.
참 세월이 무상합니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콘탁스 T3[링크]가 150만원에 거래되고 있는데 "F"가 50만원이라니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죠.
F5는 여전히 AS가 진행되고 있고, 일본의 어느 니콘 AS 센터에 가서 맡기든지 잘 정비해 줍니다.
한국은 서울 남대문에서만 수리나 조정이 가능합니다.
니콘 최후의 "Professional F"
니콘 최고의 필름 카메라를 원한다면, 그렇습니다.
답은 바로 F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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